『냉정과 열정 사이』의 주인공들은 스무 살에 첫사랑에 빠진다. 어린 연인들은 약속한다. 10년 뒤, 여주인공의 서른 번째 생일에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에서 만나자고. 하지만 두 사람이 헤어짐으로써 깨어질 위기를 맞이한다. 연인들은 지독한 다툼 끝에 헤어지고 10년이 흐른 지금, 각자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는 상태.

  약속이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 기다림과 믿음이 필수항목이다. 소설 속 연인들이 나눈 약속이 실현되기란 매우 어려워 보인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하고, 피렌체라는 머나먼 장소까지 찾아가야 한다. 시간과 공간이 멀면 멀수록 약속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연약한 인간이 시공을 초월한다는 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냉정과 열정 사이』의 주인공들은 그 까마득한 약속을 이루어낸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10년이 지나, 머나먼 이국땅 성당 꼭대기 전망대에서 기적과 같이 재회한다. 그래서 소설이다. 두 사람은 의심과 불안 속에서 노심초사하지만, 믿음을 지키고 마침내 약속을 이루어낸다. 쉽게 맹세하고 시시하게 깨어진 약속을 무슨 이유로 돌아보겠는가. 마침내 약속을 지켜낸 이들만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든다. 서른 살의 생일에 나는 무엇을 했던가. 10년 전 애인과 머나먼 여행지에서의 재회는 커녕 10년 전 애인의 생일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그렇다면 내 인생에서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가슴 찡한 약속이 없었단 말인가. 햇살이 조명처럼 내리는 어느 날, 운명처럼 약속이 이루어지던 순간이 없었단 말인가.

  살아가면서 나를 스쳐간 수많은 약속들이 떠오른다. 철없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약속들, 언젠가 함께 떠나자고 친구와 약속했던 사진 속의 여행지들, 연락하겠다고 약속해놓고 모르는 척 했던 몇 개의 전화번호들. 두려워서,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 약속들로부터 도망치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내가 그만 잊혀지고 말았기에 약속들은 나를 떠나버리기도 했다. 그런 약속들은 세월 속에서 왜 그렇게 애처롭게 빛나고 있는지. 어떤 약속은 이루어졌다면 내가 더욱 행복해졌을지도 모른다고 부질없는 미련 속으로 나를 밀어 넣기도 한다. 그래서 나도 운명적인 약속의 부름을 받아, 모든 것을 훌쩍 떨쳐버린 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날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굳이 1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거나 머나먼 나라로 떠나지 않는 이유는 소설 속 주인공들 같은 약속이 없어서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운명적인 약속이 있다. 그리고 하루하루 약속을 이루면서 살아간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지금,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장소이다.

  당신 주변에 있는 가까운 이들을 일곱 명만 떠올려보기를 바란다. 바로 그 사람들이다. 당신이 운명적인 약속을 주고받는 사람들. 그들과의 약속은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이다. 또한 그 약속은 편하고 쉽게 이루어진다. 그들은 당신의 가족이거나 친구일 것이다. 당신과 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자주 식사를 하고, 전화를 건다. 보고 싶은 영화를 함께 보러 가는 것도 그 사람들이다. 휴가를 함께 보내는 것도, 아플 때 제일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바로 그 사람들이다. 이 모든 삶의 순간들은 사실 약속이라는 기반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과 삶을 나누겠다는 약속.

  그런데 무언가를 '약속한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새삼스러운 믿음과 인내를 요구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이미 충분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굳이 '약속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믿고 기다리면서 사람은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원대한 약속을 통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보다는 하루하루 공기처럼 사소한 약속을 통해 행복한 사람이 되기 원한다.

  멋지지 않은가. 약속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하고 다정한 약속들. 먼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약속들. 바로 오늘 저녁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내가 슬플 때 지체 없이 전화를 걸 사람이 있다. 변치 않는 약속처럼 누군가가 내 곁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진정한 사랑이란 끝없는 약속인지도 모른다.

  10년 후에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서의 기약이 없다 해도 그리 슬퍼할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 곁에 있는 그 누군가와 10년 후에 피렌체로 여행을 가자고 약속해보는 건 어떨까. 10년 동안 당신이 그 사람과 늘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 10년 만에 만나 서로가 없어 외로웠다는 고백보다는 10년 동안 쌓아온 수많은 약속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으면 좋겠다. 10년 후, 두오모 성당 위로 내리는 은총의 빛 속에서. ⓟ
글_안신영 (출판기획자. 도서출판 행복한상상 대표) 푸르덴셜생명사보 2006 Autumn·Winter

며칠 전, 회사로 날아온 푸르덴셜생명 사보의 이번 주제는 "약속"이었다.
첫마음과 약속 / 사랑은 끝없는 약속 같은 것 / 소원을 이루다, 희망을 약속하다 / 10년의 약속, 그 이상의 약속 / 나와의 약속, 나를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특별한 주제들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쉽게 내뱉고 지나치는 것들이 아닌 위의 글 첫 문장에서처럼 약속이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이루는 것, 그것은 기다림과 믿음에 기인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반면 작심삼일 / 사랑이 변하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불안감 혹은 변질된 사랑에 대한 자기 합리화로서의 변명 /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상 등등...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쉽게 '약속'을 지켜나가지 못하는 이유들이 될 것이다.

프랑스 속담에 '가능한 한 약속을 하지 말라, 그러나 약속을 했으면 목숨을 걸고 지켜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약속은 지킬 때만 그 효용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위의 글에 등장하는 연인들의 약속은 조금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내 자신'에 대한 절실함이 아니라 '그들'의 절실함-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으로 그것이 절대적으로 맞이하는 한 순간, 즉 타이밍일 것이다. 타이밍이란 절대 앞서서도 하물며 뒤쳐져서도 안되는 것으로 나 혼자만의 미뤄짐작으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을 평소 얼만큼 솔직하게 성찰하며, 상대방을 얼만큼 관심있게 관찰하고 표현하는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이러한 약속 아닌 약속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우린 분명 7시 저녁 약속에 상대방이 5분을 늦더라도 그 이유를 추궁하지 않을 것이며, 지각의 변명에 앞서 상대방에게 5분이 아닌 10분 정도 늦어질 거 같다는 여유로운 시간을 미리 일러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을 거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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